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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개화

흰 가운을 핑크자켓으로 만든 날

by longterm-life-story0076 2026.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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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흰 가운을 입고 싶었지만 삶은 나에게 핑크자켓을 건넸다.

 

올해 초 새학기 실습지도를 위해 7만원을 주고 구입했던 흰 가운이 단 6회 착용만에 핑크색이 되었다.

얼룩도 아니었다.

군데군데 번짓 것도 아니었다.

아주 고르게, 부드럽게 물든 연핑크였다.

 

세탁기에서 꺼낸 순간 잠깐 멍해졌다.

"어랏? 이거...내거 맞나?"

그리고 곧바로 튀어나온 말

"정신 차리자...단독세탁을 했어야 했는데..." 

세탁버튼을 누를때 찜찜함을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괜히 아들 잠바 탓도 해보고, 다시 세탁기에 넣어볼까 망설이다가 

결국 표백제까지 꺼냈다.

십분, 이십 분..... 한시간이 넘게 기다렸다.

 

하지만 결과는 그대로였다.

핑크 가운

그 순간 묘하게 힘이 빠졌다. 그리고 동시에 너털 웃음이 났다.


생각해보니 나는 이 가운에 꽤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번 학기에는

조금 더 단정하게,

조금 더 준비된 모습으로,

조금 더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던 마음

그래서 조금 더 비싼 걸 샀는데...

그래서 더 아까웠다.

그런데 그 마음이 세탁기 한 번에, 아주 가볍게 틀어져 버렸다.


나는 흰 가운을 입고 싶었지만 삶은 나에게 핑크 가운을 건넸다.


처음에는 실패 같았다.

실수 같았고, 내가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후회가 들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상하게도 그 가운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날카롭지 않았고,

너무 완벽하지도 않았고,

조금은 부드러운 사람 같았다.


돌봄이라는 일이 그런 것 같다. 

 

우리는 늘 더 잘하려고 하고,

더 정확하려고 하고,

더 완벽해지려고 애쓰지만

정작 사람을 만나는 순간에는

그 완벽함이 크게 중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

조금 어설퍼도,

조금 예상에서 벗어나더라도,

그 안에 진심이 있으면

그걸로 충분할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 핑크가운을 그냥 핑크자켓으로 입기로 했다.

소재도 고급소재에 시원한 원단이라 

여름에 입으면 덜 더울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가운을 볼 때마다 나 자신에게 너무 엄격해지지 말자고 조용히 말해줄 것 같아서.


완벽하게 준비된 하루보다 이렇게 한 번쯤 어긋난 날이 더 오래 남는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날들이 쌓여서 

우리는 조금 더 사람답게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그렇게

조용히 개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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