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기억 속의 그의 모습은 흐릿하지만 잔잔하다.
사진 속 그는 그녀를 다정히 안아주었지만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1년 365일 중 360여일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시장에서 채소를 팔았다.
매일같이 새벽4시 경에 일어나 일을 나갔고, 흔히 대목이라 하는 명절 전이나 김장철에는 새벽 2-3시경에 집을 나섰다.
집에 오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그보다 고작 30분 내지 한 시간 정도를 먼저 집에 들어와 아이들을 챙기고, 저녁을 준비하였다. 봄, 여름, 가을뿐 아니라 한 겨울 해가 져버리고 이른 시각 어두컴컴해질 때에도 저녁 8시는 넘어서야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그제야 온 가족은 저녁을 먹었다. 또 대목에는 밤 12시나 1시경에 겨우 들어와 한두 시간 눈을 붙이고 곧장 나갔다. 그럼에도 항상 근엄한 표정으로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무슨 낙이 있었을까? 여자는 종종 생각하였다. 다른 많은 직업들이 있는데 그는 왜 저 힘든 일을 선택했을까?
여자는 학교를 마친 후 혹은 학교에 가지 않는 날 그와 그의 아내가 일하는 곳에 나가 함께 일손을 도왔지만 그가 야속할 때도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그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고 지나간 적도 있었다.
한창 공부를 해야 할 시기에 여자는 그의 아내에게 준비물이나 문제집을 사야 한다 말했고, 그의 아내는 그에게 필요한 돈을 적어 머리맡에 두라고 일러주었다. 여자는 그가 들어올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때도 있어, 혹은 그가 잠든 뒤에 깨울 수가 없어 그의 아내가 일러준 대로 메모를 해두었고, 다음날 아침 머리맡에 필요한 액수의 돈이 놓여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여자는 꼭 독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여자는 대학에 입학하여 집에서 나와 지냈다. 그리고 집에 종종 내려갔는데 어느 날은 그의 아내가 낡은 짐을 정리하다가 카세트 테잎을 발견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만화영화주제가였는데 한창 추억을 떠올리며 흥얼거리던 중 갑자기 '달깍' 하는 소리와 함께 앳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자아이는 수줍게 '산토끼'를 부르다가 말미에 가서 빠르게 노래를 끝마쳤고, 그 사이 어디쯤 그와 그의 아내의 응원이 함께 흘러나왔다. 정말 잠깐 이었다.
여자는 앨범을 넘겨보며 옛생각에 잠시 빠져든 적도 있었다. 여자가 어른이 된 후 언젠가 어렴풋이 그의 아내로부터 들었던 그에 대한 이야기는 거창하지도 시시하지도 않았다.
그는 유복한 가정의 아들이 아니었기에 청년시절 큰 누나 밑에서 머슴처럼 일을 배웠다고 했다. 그리고 혼인할 나이가 되자 선을 그의 아내와 선을 보았고, 약혼식을 간단하게 치른 후 결혼을 하였다 했다. 결혼을 하여 한 가정을 꾸린 후에도 누나, 형의 부름에 버선발로 뛰쳐나가 일을 하였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그게 달갑지만은 않았다. 누나의 가게에서 종처럼 일을 하다가 시장 한 구석에 겨우 자리를 잡고 장사를 시작하였을 때라 그가 없을 때는 그의 아내가 그의 몫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라 했다.
'삶에 대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에 대한 기억#4 (2) | 2024.12.19 |
---|---|
그에 대한 기억 #3 (2) | 2024.12.17 |
그에 대한 기억 #2 (0) | 2024.12.16 |
내 솥에는 무엇을 채우고 사는가? (0) | 2024.12.05 |